고대 베리타스 포럼을 다녀왔다.

어제 오늘 고대에서 하는 베리타스 포럼을 다녀왔다.
첫 날은 오스 기니스 박사가 말하는 ' 포스트 진리시대에서의 진리선포 ', 두번째 날에는 강영안교수, 우종학교수가 이야기하는 '존재하는 것들  : 과학자와 철학자의 기독교적 사유 ' 에 대한 포럼이었다.

기대하고 간 것은 자주 출몰치 않을 것이라는 희귀성때문인지 괜한 사대주의인지- 오스 기니스 박사의 강연이였다. 그보다는 아마 주제때문이었다. 이전부터 탈진실 화두에 대한 내 관심은 지속적이었으니.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뭔가 더 센세이션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갔던 것 같은데 그렇지만 그런 기대감이 충족되진 못했고, 마치 수능 전날의 담임선생님 당부말씀 같았다. (나도 이미 수능을 그렇게 임해야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얼른 수능을 봐버리고싶은 마음..?) 무슨 느낌인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무튼..

우종학 교수님은 페이스북으로 쭉 받아보기하며 접해왔지만 현실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는데, 그렇게 언변도 뛰어나신 분일지 몰랐다. 든든한 아군에 마음이 위로받고 풍족해짐을 느껴버렸고 앞으로 과신대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참여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 포럼을 통해- /아마 이 포럼을 듣기 전에 읽었던 책들에 영향도 받은 결과물일테지만 /  생각거리가 된 것들은 이러하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 것이 윤리라는 단어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 조셉 플레쳐

우리는 혼돈의 지식이며 변화의 심오한 구조는 부패이다. 뿌리에는 부패만 있고 도무지 막을 수 없는 혼돈의 조수가 있다. 목적은 사라직 남은 것은 방향밖에 없다. 우주의 중심을 냉정하게 깊숙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 암울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피터 앳킨스

문화적 엘리트를 자처하는 수많은 집단들 사이에서 세속주의와 자연주의적 세계관이 득세하는 반면, 유대교적 기독교 시각은 촌스럽고 수구적이며 인간 번영과 진보에 방해만 되는 한물간 천덕꾸러기 취급이 당연스러운 분위기이다.  /우리는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정보로 ㅁ든 것을 실시간으로 보는 첫 세대이다. 모든 것이 상호연결되어 있으나, 아무도 책임지는 이가 없다. 필요가 즉각 충족되고 편리들을 노력없이 누리는 세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과부하 세상이 되었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은 야만적이다. 그 것은 다른 사랑을 모두 희생하며 행해지기 때문이다. -니체
니체 :  관점주의. 진리라는 힘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룬다. 현상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좀 읽어봐야겠다. +미셸 푸코 도..

신에 대한 경험은 보편적이다. 존재의 특성은 질문을 낳는다. 
과학 마저도 이중적이다. 빛은 입자인가 파동인가? 입자이기도 하며 파동이기도 할 순 없지만, 빛은 입자이기도 하며 파동이기도 한다. 이 것은 경험의 배반인가 이성의 한계인가?  명백하다 여겨지는 '실재' 에도 이중성이 있다.  과학은 단면만을 볼 수 있을 뿐, 전체를 해결할 수 없다. 과학과 가치판단은 이분법일 수 밖에 없다. 가치를 과학적 근거로 판단하는 것은 내 현재 머리로는 불가능하다.  

진리에 대한 믿음은 명제적 동의가 아니다. 진리는 증명이 아니라 헌신을 요구한다. 헌신이 진리에 이르게 한다. 


왜 무엇이 없지 아니하고 있는가? -하이데거 [형이상학 입문]


진리가 진리임으로 받아들여지고, 논리싸움에서 승리를 해 입증이 된다한들 그 것이 나의 삶 하나를 바꾸지 못한다면 진리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교수님이 한 진리는 헌신을 요구한다는 말이 오늘의 월척이다. 헌신은 용기와 수고를 요구한다. 지속적으로 진리를 닦고 씻기고 거르는 과정은 귀찮다. 귀찮음을 극복하는 힘은 거대하다. 거대함이 크게 임해야 한다. 비판적 실재론적으로 사건을 보고 세상을 보는 습관을 취득해야겠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