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지난주 금요일 밤에 종강했다. 그러고 토요일엔 합정지구 미러전시를 보고 커피를 먹으며 인생사 토론을 하고 일요일엔 교회에 가서 초딩아이들이랑 같이 놀며 떡볶이를 사주고, 월요일 화요일엔 국제교류처에서 노동을 했다. 그러고 나니 이제 오늘인 수요일이 되서야 조금 노트북켜고 글 써볼 여유가 생겼다. 
한 학기 끝나고 나니 또 다른 채찍을 마련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화요일 오전엔 국교처 노동을 하러 가기 전에 행화탕 답사에 갔다. 전시하기 위해 드는 돈은 내가 감당하기에 크다. 전시하고 노출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선 돈을 내야한다. 나는 지원받은 것이 없기 때문. 지원받은 것이 없기보다도 아직 지원받기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금전 지원은 경쟁을 해서 당선이 되야 받을 수있는데 나는 무슨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부터 내 경쟁력을 생각해볼 예정...

한 학기동안 한 내 도구희롱 작업은 어떻게 다음 연구로 연장될 수 있을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계문명 사회 속에서 기계가 제공하는 과잉된 편리에 느낀 무력한 패배감이 본 작업의 동기이다. 현 세대에게 ‘기계 도구’의 의미는 단순한 동력도구나 수공구가 아닌, 없으면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삶의 필수구성 요소이다. 기계 도구들이 제공하는 편리함은 기계 존재 이전의 삶을 상상할 수 없을만큼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해 있다. 큰 노력없이 쉽게 누릴 수 있고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는 필요량 이상의 과잉된 편리에 우리는 점점 익숙해져 왔다. 쏟아지는 편리의 세례 속에서 동시대인들은 신체를 사용하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고, 최소한의 노동에너지도 소비하지 않고 보낼 수 있는 하루도 생겨났다. 그러나 기계가 발전해나가는 만큼 영육은 무력해진다. 쌓이는 잉여노동 에너지를 분출하기 위해 동시대인들은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목공을 취미로 삼거나, 수제로 맥주를 제작하고, 현상이 오래걸리는 필름카메라를 다시 찾는 등 이런 취미생활을 ‘소확행(小確幸)’ 이라 부르며 잠재워져 있던 영육의 사용을 추구한다. 이렇듯 무력함을 이겨내기 위해 자발적 불편을 선택하려 해도, 오래전부터 노출되어온 필요량 이상의 달콤한 편리는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권력이다.
본인은 오랫동안 노출되어왔던 편리에 깊은 의존을 하고있음을 깨닫는 순간 더 큰 무력함을 느꼈고, 더 이상 거부가 어렵다는 사실에 존재 위협을 느꼈다. 또한 이러한 위협감이 많은 동시대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정이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를 시각 예술을 통해 드러내고 마주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인간과 점점 동등해지는 기계문명에 대한 경계, 가랑비에 옷젖듯 기계 도구가 주는 편리에 중독되어 점점 무력해져가는 현대인에 대한 연구가 작업의 목적이다.
 본 작업은 제 ‘동시대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무력감’을, ‘편리를 제공하는 기계를 농락하며 무력감을 해소하려는 한 개인의 행위’ 라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본 작업 속에서 보여지는 무력감의 해소방식은 러다이트 운동 이 보여지는 방식을 닮길 추구한다. 영국의 산업혁명 시절, 러다이트 운동가들의 기계가 우위를 점해 일자리를 빼앗기는 상황 속에서 느낀 불안감과 두려움은 기계를 고의적으로 고장내고 때려부순다는 행위로 표출되었다. 그들이 기계를 부수는 일을 자행하게 만든 고통은 당대로서는 슬픈 사회현실이지만, 그 표출방식은 당대 사회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우둔한 방식이다. 우스운 감정과 안타까운 감정을 동시에 발현시키는 이러한 우둔한 행위가 현 발전사회 속 무력감에 지쳐가는 본인을 비롯한 동시대인들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판단되어 차용하였다. 작업을 ‘놀이’라는 방법으로 제시함으로써 작업을 체험하는 operator가 유희를 얻길 원하는 구조임을 드러내었다. 놀이의 내용이 진정한 유희를 제공하거나 효율성이나 생산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관람을 통해 깨닫으며 쓸데 없는 행위 라고 여겨지게 연출하였다.
또한 본 작업에는 작업물을 만든 제작자가 발전사회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피해의식을 느끼는 어떤 찌질한 인물의 표본으로 설정하는 것이 하나의 작업 제시 방법이다. 본 작업 속 작업을 진행한 제작자로 설정된 인물은 아무런 생산성이나 효용가치가 없어보이는 ‘기계를 농락하는 행위’를 통해서 우월감과 안도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얻는 인물로 설정되어 제시된다. 


 이 작업을 하면서 내가 발견한 건, //제작자의 입장에서 발견한 건, 
편리도구를 농락하려고 진행한 작업의 드는 나의 노동력은 결국 또 다시 편리도구에게 당하는 농락이었다. 뭔가 하려고 하면 결국은 또 당한다.  
내가 다루려고 하는 건 결국 편리도구가 우리한테 어쨌고 저쨌고 라기 보다는, 이런 편리 사회 속에서 노출되어 살아가는 우리가 잠식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찾기 이다. 그리고 최첨단고효율사회 속  survivor들 곁에 좀 모지라고 든든한 우둔한 병신으로 존재함으로 위로해주고 싶은 것인 것같다.
어떻게 하면 우둔병신의 뻘짓들을 만들며 survivor들의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까?  이제 고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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